지도박물관에서 나와
수원 화성 쪽으로 방향을 잡고 출발해서 처음 만난 건 팔달문 도심 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팔달문은 서울에 있는 남대문같은 느낌이었다. 이걸 보려고 수원까지 왔나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드는 순간이었다.
팔달문을 지나 주차장을 찾아 창룡문 쪽에 도착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성곽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할까. 얼마전에 남한산성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온 나로서는 어느 정도의 성곽터 정도로는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기차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수원 화성 투어 기차를 예약해 두고 창룡문까지의 성곽길을 걸어갔다 오기로 하고 출발. 첫번째 망루에서 한 컷. 날씨가 좋아서인지 사진기만 던져도 사진이 될 것만 같은 느낌. (하지만 이럴 때마다 DSLR에 대한 지름신이 코 앞까지 다가와서 유혹하곤 한다. 디카의 한계 OTL..)
1794년부터 1796년까지 2년 9개월에 걸쳐 만들어진 수원 화성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건물들이 제법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아래 건물은 공심돈이라는 망루의 일종으로 벽돌로 둥그렇게 쌓아 올린 모양이 특이하게 생겼다.
창룡문 근처까지 도달해서 맞은 편을 보니 '수원 시티 투어'를 온 사람들의 행렬이 보인다. 중국 관광객들이었을까? 앞의 촌스러운 깃발을 든 사람이 없는 것으로 봐선 일본인들이 아닌 중국인이나 한국인들이리라. ^^;
창룡문. 팔달문에 못지않게 제법 웅장하다. 하지만 곳곳에 후세에 보수한 흔적이 많아 예전의 자연미가 많이 손상되어 보이는 것이 아쉬운 대목. 하지만 창룡문의 단청과 기와지붕이 만들어내는 멋진 곡선이 푸른 하늘이 유난히 잘 어울어져 그런 아쉬움을 넘어서서 작은 우림으로 다가 온다. 멋지다!
화성성곽은 정말 아름답다 돌을 어찌 이렇게 깎고 쌓았는지,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지만, 그래서 더욱 자연스럽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여기서 퀴즈! 사진 속에서 튀는 돌 2개를 찾아보시라. 나머지는 자연스럽기도 하고, 세월의 흔적과 함께 인간미가 흠씬 느껴지지만 두 개의 돌이 다소 흥을 깬다. 분명한 건 때때로 100층을 훌쩍 넘는 건물을 올려대는 놀라운 현대 건축 기술로도 범접하기 어려운 옛 선인들의 손끝을 느끼곤 한다. 정답 - 마우스로 긁어보세요 (맨 위 가운데 돌, 네번째 줄 맨 왼쪽 돌)
창룡문에 올라 바라 본 성 바깥 쪽의 모습. 성곽을 따라 배치되어 있는 조명들은 밤 풍경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여 준다. 아쉽게도 일요일이라 밤 풍경을 보고 오지 못해서 다음 번 여행은 꼭 밤 산책을 해 보는 것으로 구상을 해 본다.
화성열차를 타러 가야 한다는 아들의 재촉에 서둘러 돌아 온 뒤, 시간이 남아 옆의 국궁체험장을 구경했다. 체험에는 인당 1천원. 5발씩 준다. 처음에는 거의 대부분 표적을 맞추지 못하지만 3~4발쯤 가고, 선생님들이 옆에서 지도해 주면 한 두 명씩 경쟁적으로 표적위의 멧돼지 면상을 맞추기 시작한다. 역시 한국인들은 궁의 명수다. 중국인들도 우리 민족을 東夷라고 하지 않았는가?
시티투어의 인기 있는 한 코스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같다. 꼭 쏴 보시길.
그 와중에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여쁜 처자의 활품새가 멋져 기념으로 한 컷.
자자 구경하는 동안 드디어 화성 열차 도착. 앞 쪽의 용두가 인상적이다. 놀이동산의 허망한 기차들처럼 생겼지만, 이 기차는 무려 30여분을 실제 수원의 도로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의 외곽을 따라 한바퀴를 크게 돈다. 최고의 체험거리다.
화성열차를 타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창룡문 근처에서 상상했던 초라한 수원 화성에 대한 편견은 여지없이 깨졌다. 외곽을 돌면서 본 화성의 모습은 웅장하면서도 위압적이기보다는 평온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성의 모습이었다. 성곽 주변의 잔디밭 곳곳에는 수원 시민들로 보이는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평화로운 오후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일산에 호수공원의 모습처럼. 전쟁의 풍파를 겪지 않아서 였는지 성곽은 전체적으로 온전해 보였다. 전쟁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서였을까 정말 평온한 유렵의 어느 조용한 성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화성열차의 종점인 팔달산에 내리면 화성행궁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주의할 점은 화성열차는 편도다. 창룡문-> 팔달산, 팔달산->창룡문으로 각각 따로 표를 사야 한다. 아마도 왕복을 이용하는 사람보다는 편도만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서이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로 수원 화성에는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창룡문 근처와 화성행궁 두 곳이다. 어느 한 쪽을 택해서 주차하고 구경을 한 후 열차로 움직이면 된다.
화성행궁은 경복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아담하고 구석구석을 보는 잔재미가 느껴지는 궁이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과 시설들이 최근에 지어졌거나 완전히 다시 지어져 별로 세월의 흔적같은 건 느끼기 힘들었지만 그런대로 운치가 있고, 안온한 느낌의 궁이다. 이 역시 한이 많이 서려 있는 경복궁보다야 당연히 평화롭게 느껴질 수 밖에 없을 듯. 한이 서린 궁녀들도, 투기의 화신이 된 수많은 후궁들과 피와 비명들이 없는 비상 시의 행궁 아닌가? 화성행궁 안에 '노래당'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는 정조가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노후생활을 즐기기 위해 만들었다는 건물이다. 아쉽게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암살당하고 말았으니...참.
아래는 수원화성을 설계한 정약용 선생이 화성의 축성을 위해 고안한 기중기다. 이런 실학파들의 공로로 불과 2년여 만에 저 거대한 성을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
정조가 직위 이후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으로 매년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행차했던 수원이다. 화성행궁에도 뒤주가 있어서 뒤주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 뒀다. 뒤주 안에 들어가 있는 울 아들. 무서운 이야기가 서려있는 뒤주련만 아들이 들어가서 빼꼼히 얼굴을 살짝 들고 있는 모습이 쌀을 훔쳐먹다 들킨 다람쥐같아 귀엽다.
궁 안에서는 한과 체험, 한지탁본 체험, 오미자차 체험, 도자기 만들기 체험, 궁중의상 입어보기 등의 다양한 체험장이 마련되어 있다. 이 체험장은 주말과 공휴일에만 하는데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하니 아이들과 함께 갈 때는 이 시간을 놓치지 말 것. 아무래도 여유롭게 하려면 화성행궁을 먼저 보고난 후 화성 성곽 구경을 나서는 편이 좋다. 아래는 한과 체험이다. 이런 체험들은 각각 엽전 한닢이나 두닢 정도면 할 수 있는데 옆전 한닢에 천원씩이다. 한과 체험은 옆전 한닢에 한과는 3알. 맛은 별로인데도 아들은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에 흠뻑 빠져서 너무 즐겁게 먹었다. 추천!
행궁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주요 건물마다 건물의 특성에 맞게 스탬프를 찍을 수 있도록 해 두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천원을 주면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인쇄된 안내종이를 파는데 나중에 다 찍어서 가면 코팅까지 해 주는 모양이다. 우리는 그걸 몰랐지만 다행히도 작은 스케치북을 들고 가서 별 문제없이 찍어왔다. ^^
건물들 자체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아이들에게는 궁 안의 숨은 보물을 찾는 게임같은 것이라 아주 재미있게 궁의 곳곳을 탐험할 수 있도록 배려해 둔 것으로 보인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참 돋보인다.
아래의 그림은 정조의 을묘원행 그림 동판이다. 을묘원행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년회를 열기 위해 수원으로 행차한 것을 말한다. 이 그림은 노량진에 36척의 배를 띄워 다리를 놓은 것을 묘사한 것으로 을묘원행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보여준다. 행궁 뒷편으로 돌아가 보면 벽면에 붙어 있다.
화성에는 아름다운 수문이 하나 있다. 이 사진은 수문에서 흘러 내려오는 수원천을 찍은 풍경이다. 수원천은 천을 따라 양 옆으로 수려한 버드나무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이 풍경을 보고 정조가 '버드나무를 닮은 성을 만들라'고 했다고 한다. 수원천은 자연하천으로 성공적으로 정비된 최초의 하천으로 청계천 복원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나에게 수원은 그리 의미있는 곳은 아니었다. 학창시절에 한두번 온적은 있었는데, 서울대 농대근처였고, 그곳의 호수가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인기가 있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었다. 수원역에도 가보았는데 마치 영등포같은 느낌만 남아있다. 그 이후엔, 삼성의 공장이 있는 수원..정도의 의미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번 여행으로 수원에 대한 인상이 아주 달라졌다. 화성과, 화성성곽주변의 잔디밭의 평화로운 사람들, 팔달산의 안온한 정기.. 머 이런 것들이 이제 나의 수원에 대한 인상이 되리라. 우리는 다시 수원에 가기로 했다. 다시 갔을때는 낮에 천천히 수원성곽주변을 드라이브하고, 밤의 풍경도 보리라 생각해둔다. 수원은 멋진 곳이다. 그렇게 되었다.